4장 하늘색 멜로디

햇빛이 먼저 와 있었다.
완연한 봄 아침이었다.

바람이 가볍게 불다 잦아들었다.
비가 갠 자리의 풀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꼬르르.

냠냐미의 배가 울렸다.

잘 먹으니까 잠도 잘 오냐미~

냠냐미는 사료 그릇을 보고 놀랐다.

히익. 무슨 일이냐미?!
왜 사료가 안 차 있냐미?

그릇 바닥에 알갱이 하나가 외롭게 남아 있었다.

가만히 빈 그릇을 보다가
원이가 오는 골목을 보았다.

‘원이가... 오늘은 바쁜가 보냐미.
......
그래도 바쁜 건 좋은 거냐미.’

(...꼬르르.)

냠냐미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아주 맑았다.

에너지 비축..!
오늘은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 거냐미

방석 쪽으로 돌아가려다가 멈췄다.

꼬르르.

배가 또 울렸다.

✦ ✦ ✦

박시한 검정 반팔에 카키 바지.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듯한 얼굴.

어깨선까지 오는 밝은 곱슬머리가 걸음마다 가볍게 움직였다.
목에 걸린 실버 체인이 햇빛에 반짝였다.

연이는 걷고 있었다.

띠링.

[입금 ○○○,○○○원]

“오예~ 일당 들어왔다~ 저번 달에 찜해둔 신상 사야지~!”

연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벨소리)

“어~ 나 가고 있어.”

핸드폰 너머로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연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알겠어. 다음에 보자~”

연이는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갑자기 여유로워진 하루! 오히려 좋다!
오늘은 왠지 그냥 걷고 싶네.”

연이는 이어폰 한쪽을 귀에서 뺐다.

‘이렇게 여유로운 날에는 자연의 소리가 노래지~!’

짹짹. 짹짹.

“그래. 너도 오늘 여유가 넘치는구나. 나도 오늘 그냥 좀 걸으려고.”

산책하던 강아지 한 마리가 연이에게 다가와서 짖었다.

왈. 왈왈.

“어머. 죄송해요. 물지는 않아요.”

“그래. 안녕~~”

‘이어폰을 빼고 걷길 잘했네.
언젠가 동물이랑도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크크.’

부드럽게 부는 바람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연이의 걸음이 느려졌다.

어느 순간부터 낯선 골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연이는 잠깐 멈췄다.

'어라? 처음 보는 동네네. 와본 적이 있었나?‘

연이는 주위를 기웃거렸다가, 다시 걸었다.

연이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나는지 모를 만큼 작은 음악 소리 같은 것.

‘음악... 소리인가? 아닌가...’

그러나 어디선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이는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뭐지? 나만 들리나?‘

귀를 기울이니 길이 보이는 듯했다.
공원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연이의 발걸음이 공원 쪽으로 향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산책로가 나왔다.
소리가 더 또렷해지는 쪽을 따라 걸었다.

걷다보니 산책로에서 많이 멀어져 있었다.

벗어난 자리에 수풀이 한 겹 있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뚝 끊겼다.

연이는 수풀 가지를 젖혔다.

낮은 담벼락 아래,
주황빛 지붕의 작은 집이 숨어 있듯 놓여 있었다.
누가 일부러 감춰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햇빛을 받아 털이 투명하게 보이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연이는 멈췄다.
방금 듣던 소리가 기억에서 빠르게 흐릿해졌다.

작은 고양이였다.

하얀 털. 분홍빛 뺨. 까만 눈.

눈 위로 속눈썹 세 가닥이 바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풍성한 꼬리가 발 앞에 둥글게 말려 있었다.

‘귀엽다.’

연이는 이상하게 이 작은 고양이한테 자꾸 마음이 갔다.

✦ ✦ ✦

냠냐미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연이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오잉? 원이가 아니냐미?

'이상하냐미.‘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원이랑 비슷한 듯 다른 듯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연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안녕?”

안녕하냐미. (냐.)

연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연이는 다가가 쪼그려 앉으면서
냠냐미 얼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냠냐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물러난 자리에서 가만히 연이를 봤다.

연이가 손을 거두며 잠깐 멈칫했다.
그런데 웃음이 먼저 나왔다.

“엇. 미안.”

거리를 두고 다시 쪼그려 앉았다.

“너도 네 자리가 있는 거지.”

'흠.‘

냠냐미가 연이를 가만히 봤다.

...나쁘지 않은 기운이냐미.

연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연이라고 해.”

냠냐미의 까만 눈이 연이를 보고 있었다.

“넌 이름이 뭐야?”

냠냐미냐미. (냐.)

연이가 피식 웃으며 냠냐미의 소리를 따라했다.

“오호 그렇구나. 냐~.”

가방을 뒤적였다.

“잠깐, 뭐라도 줄 게 있을까...”

‘?! 두 번째 기특한 사람인 거냐미!!’

배가 고픈 냠냐미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연이는 가방을 닫고 머쓱하게 웃었다.

“마땅하게 줄 게 없네.”

히잉. 없는 거냐미

냠냐미의 귀가 팍 꺾였다.

’배만 더 고파졌냐미...’

“아이구. 기대하게 하고 미안해.
대신 다음엔 정말 맛있는 걸 꼭 챙겨올게.”

아니냐미 아니냐미! (뇨뇨 뇨뇨!)

괜찮냐미~!!! (냐~)

연이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혼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어쩌다 이 동네까지 왔는지. 원래는 약속이 있었는데 친구가 취소해서.
그냥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처음 오는 동네인데 왠지 기분이 좋았다고.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재밌는 거잖아.”

연이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너도 만났고.”

완전 인간 라디오냐미.

냠냐미가 흥미롭게 연이를 봤다.

귀를 앞쪽으로 기울인 채 집중해서 들었다.

연이가 고양이 쪽으로 얼굴을 더 가까이 했다.

“진짜 너무 예쁘다.”

“어떻게 이렇게 예뻐.”

엣헴 뭐, 사실이긴 하냐미.

숨길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진 표정이었다.
냠냐미는 앞발을 가지런히 모았다.
꼬리 끝은 계속 흔들렸다.

냠냐미는 연이에게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연이가 놀라며 손을 가슴에서 모았다.

냠냐미가 연이의 무릎 앞까지 왔다.

연이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번엔 냠냐미가 물러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이마에 닿았다.

톡.

연이의 모습 위로
하늘색 세잎클로버가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둘 사이 봄 햇빛에 옅은 푸른 기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연이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 방금 뭐였지.’

냠냐미의 이마가 닿은 손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 ✦ ✦

발 밑의 그림자가 잔뜩 길어졌지만,
연이는 일어설 줄 몰랐다.

친구와 오늘 사려던 신상 이야기. 사장님에게 혼난 이야기.
요즘 팔고 있는 옷 중에 잘 나가는 게 생겼다는 이야기.

연이는 처음 만난 고양이에게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댔다.

“...근데 사장님도 진짜 속상해서 그러셨을 거야. 좋은 분이시거든.”

냠냐미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시간이 좋았다.

"있잖아.“

냐~

연이가 말했다.

“네가 보고 싶으면 여기로 오면 되는 거야?”

냠냐미의 눈동자에 연이가 비쳤다.

“나 매일 올게.”

말해놓고 연이는 혼자 조금 쑥스러워졌다.

‘처음 본 고양이한테 벌써 이런 약속을 하고 있다니.
그래도 취소하고 싶진 않아!’

냠냐미가 호오? 하는 눈빛으로 연이를 쳐다봤다.

“연이가 좋으면 나도 좋냐미~” (냐냐~)

연이의 귀가 한 번 먹먹해졌다.

“어? 지금 좋다고 말한 거 같은데?!
아닌가?? 맞지?? 하하하.”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벨소리)

“어, 응. 지금? 아, 알겠어. 거기로 갈게.”

통화를 끊고 냠냐미를 보며 말했다.

“나 가야겠다.”

연이는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내일 맛있는 거 잔~뜩 가져올게.”

연이는 손을 크게 흔들고,
수풀을 빠져나갔다.

✦ ✦ ✦

골목에 혼자 남은 냠냐미는
연이가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봤다.

매일..?

냠냐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석 쪽으로 돌아갔다.

내일 정말로 맛있는 걸 들고 오려냐미 키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냠냐미는 방석 위에 올라가 웅크렸다.
물그릇에 자기 모습이 비쳤다.

역시 예쁜 게 최고냐미!
앞발로 얼굴을 쓸었다.

냠냐미는 힘없이 냠냠볼을 하나 꺼냈다.

‘아껴 먹길 잘 했냐미...’

반으로 가르기 쇼를 할 기운은 없었다.

오물오물.

하~~~~ 살 것 같냐미..

어두워지는 하늘.

아직 깜깜해지지 않은 자리에 하얀 달이 보였다.
반쪽보다 조금 더 차오른 달이었다.

냠냠볼을 먹고 에너지가 돈 냠냐미가 흥얼대기 시작했다.

(냐냐냐— 냐냐냐냐— )

얼핏 들으면 멜로디가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에 수풀이 박자에 맞게 흔들렸다.
수풀 그림자에 더 짙은 그림자가 스쳤다.

그 위로.
지붕 너머 하늘 끝에.
별 하나가 작게, 길게, 흘렀다.

냠냐미는 보지 못했다.

✦ ✦ ✦

4장 「하늘색 멜로디」 끝 · 5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