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행복이라는 이름

며칠이 지났다.
비가 그치고, 골목의 흙바닥이 다시 단단해져 있었다.

햇볕이 골목 안쪽까지 길게 들어왔고, 풀잎이 한 톤 더 진해졌다.
제법 봄냄새가 났다.

냠냐미는 방석 위에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번갈아 구르는 중이었다.

...군살이 쪼~꼼 붙은 느낌이냐미.

냠냐미는 배를 조물조물 만지다가 두드렸다.

통통~

맑은 소리가 났다.

...흠.

누운 채로 짧은 뒷다리를 천장 쪽으로 들었다 내렸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하낫, 둘. 후.

하낫, 둘. 후하.

헛... 둘.......

다섯 번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간 다리는 올라오지 않았다.

방석에 작은 배가 천천히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눈을 떴을 때 햇볕이 자리를 옮겨 앉아 있었다.
방석의 한쪽 끝이 따뜻해져 있었다.
냠냐미는 그쪽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툭.

냠냐미의 등이 네모난 무언가에 닿았다.

냠냐미가 고개를 돌렸다.

오잉? 저게 뭐냐미.

구석에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원이가 두고 간 거냐미?

제대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냠냐미는 앞발로 스케치북을 건드렸다.

휘릭.

첫 페이지가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빈 종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머릿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했다.

며칠째 떠오르지 않는 것이 있었다.

...뭔가... 있었냐미...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봤지만, 잡히지 않는 이름이었다.

흠.

체념한 듯, 시선이 옆에 있는 크레파스로 흘렀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그리고 한 톤 연한 파랑.

색이 많은 크레파스였다.

무엇을 그리려는 건지도 모르면서
다만 그리려는 자리에 이 색이 있어야 한다는 듯
앞발이 하늘색에 닿았다.

슥.

하트 하나.

슥슥.

하트 둘.

호오? 처음 그리는 그림치고 나쁘지 않냐미. 후후.

소녀가 두고 간 작은 라디오 위로
햇빛이 가늘게 내려앉았다.

✦ ✦ ✦

이른 아침,
가늘게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을 막 연 동네 마트는 조용했다.
원이는 카트에 삼각김밥과 레토르트 몇 개를 대충 집어넣었다.

'...엄마 밥 그립다.'

애완동물 코너는 고양이와 개 그림이 요란했다.

[우리 아이 뼈 건강까지 신경 쓰고 싶다면?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 아이의 윤기 나는 모질 관리, 신경 쓰인다면? 고민하지 마세요!]

[둘 다 놓치고 싶지 않다면? 프리미엄이죠!]

'뼈 건강... 모질 관리...‘

원이는 종류별로 하나 들었다가, 내려놓고,
뒷면을 읽고, 옆 것과 나란히 두고 비교했다.

그리고 결국, 제일 높은 칸의 사료를 집었다.

카트 안에서 제일 비싼 것은 사료였다.

적당히 소분해 온 사료봉지를 들고
원이는 공원으로 들어섰다.

앞뒤로 출근길 우산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원이의 걸음만 느렸다.

‘다들 바쁘게 사는구나.’

공원 정원 한쪽에 못 보던 흰 가림막이 둘러쳐 있었다.

"어어— 조심, 조심.“

가림막 안쪽에서 소리가 띄엄띄엄 넘어왔다.

원이는 가림막을 피해 우산을 높게 들어 올리며 길을 지나갔다.

골목 입구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냠냐미가 색칠하던 손을 멈췄다.
귀가 한쪽으로 쫑긋했다.

‘원이냐미?’

손에 사료봉지를 든 원이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어?
비가 오면 산책하러 나가는 거 아니었어..?”

냠냐미가 스케치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산책은 날씨가 이 몸을 원할 때,
그리고 이 몸이 응답할 때 하냐미!
(냐냐냐 냐냐냐앙 냐냐냥)

원이는 야옹거리는 소리만 들었다.

‘그때는 역시 꿈이었나... 오늘은 고양이 소리만 들리네.’

원이는 손에 든 사료봉지를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냠냐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찾았냐미! 자동사료냐미!

그리고 활짝 웃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원이였냐미~
고맙냐미 히히.
(냐앙 냥냥)

원이는 봉지를 들고 사료 그릇을 들여다봤다.
아직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안 줄었네."

원이가 냠냐미를 봤다.

"사료보다 사람 음식이 더 입에 맞는구나..?"

냠냐미가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냐미~ 훨씬 맛있냐미~~ (냥)

냠냐미의 우쭐한 표정에 원이가 작게 웃었다.

원이는 사료를 그릇에 부었다.

사르륵.

알갱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소란스럽지 않게
원이는 봉지 끝을 한 손으로 받쳤다.

“...그래도 사료가 메인이야.
사람 음식 많이 먹으면 고양이는 아파요~”

...쳇. (먀)

냠냐미의 튀어나온 주둥이가 한번 더 앞으로 삐죽 나왔다.

냠냐미가 자리에서 살짝 비켜 앉았다.
스케치북이 옆으로 한 칸 밀려갔다.
원이는 밀린 자리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손을 얹었다.

골목 안은 조용했다.
봄빛이 둘의 어깨 위에 내렸다.

어디선가 잎사귀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원이의 시선이 스케치북에 닿았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하늘색으로 칠한 작은 하트가 둘 있었다.

“그림 그리고 있었어?”

냠냐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냐. 여기에 이 몸을 위한 취미 도구까지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냐미. (냥)

원이가 작게 갸웃했다.

“어?”

원이는 스케치북을 봤다.
그러고는 크레파스 통을 봤다.
집을 정리할 때 한쪽 구석으로 치워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였다.

“아 이건... 원래 있던 거라 옆으로 치워두기만 했어.”

냐? 그럼 원래 내 거인가 보냐미~ (야옹~)

냠냐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 씰룩거리는 표정에
원이는 웃음이 났다.

원이는 더 묻지 않고 종이 위의 작은 하트 둘을 가만히 봤다.

“뭘 그리는 거야?”

“하트? 그냥 낙서인가?”

낙서 아니냐미! (뇨뇨!)

냠냐미의 수염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러나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

사실 무엇을 그리는지
냠냐미도 알지 못했다.

✦ ✦ ✦

원이가 사료봉지를 내려놓고 편하게 앉았다.
냠냐미가 그쪽으로 반갑게 폴짝폴짝 다가갔다.
풍성한 꼬리가 처마 그늘 아래 놓인 작은 라디오를 스쳤다.

딸깍.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니다. ...오늘은 울적한 사연들이 많이 왔네요...]

“깜짝이야.”

[신나는 노래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게 되지요.
울적한 사연들을 싹 잊게 해줄 다음 신청곡입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신나는 디스코 음악이 흘렀다.

(… 펠~~리~시~다~~드… 펠~~리~시~다~~드 )

냠냐미의 귀가 쫑긋했다.

[네, 듣고 오신 곡, 보니 엠의 펠리시다드 입니다.
후렴구에 나오는 <펠리시다드>는 행복이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라고 하는데요. 외국 노래들으면 종종 만나는 단어죠!
...
이제 앞으로 노래를 듣다가 아는 단어를 만나면 더 해~피 하실 거예요.
...
노랫말처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라면서~
오늘의 날씨와 교통정보 알려드리러 다녀올게요~]

[오늘도 ~ 좋은~ 아침~ 오좋아~]
[오늘도 ~ 좋은~ 아침~ 오좋아~]
[상쾌한 아침이 필요할 땐 어서 달려오세요~]

라디오는 계속 흘렀다.

원이가 라디오를 보고, 냠냐미를 봤다.

“...라디오도 들어? ...인간 금방 되겠는데...?”

그러나 냠냐미는 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냠냐미의 시선이 바닥의 한 점을 향했다.
너무 희미해서 잡을 수 없는 기억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듯했다.

냠냐미가 기억하기를 포기하고, 원이를 올려 봤다.

그 순간,
원이의 뒤로 익숙한 잔상이 보였다.

엇!!! (냥)

냠냐미는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펠리시다드>는 행복이라는 뜻을 가진...’

펠리시다드... 펠리시다드냐미?!

펠...다냐미!!!!

귓속에서 펠리시다드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굴러다니다가
며칠 동안 잡히지 않던 자리에 멈췄다.

냠냐미가 천천히 스케치북을 봤다.

아까 그려둔 하늘색 하트 두 개가 서로 끝을 맞대고 있었다.

냠냐미는 크레파스 통에서 하늘색을 다시 짚었다.

그려둔 하트 둘 옆에 하늘색 하트를 또 그리기 시작했다.
모아진 하트 사이로 작은 줄기 하나를

슥.
아래로 그었다.

어디서 본 듯한 하늘색 세잎클로버가 있었다.

원이의 시선이 그 그림에 닿았다.

종이 위에서 아주 잠깐,
푸른 기운 같은 것이 옅게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빗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원이는 머리를 기울이고 귀에 공기를 넣었다가 뺐다가 했다.

‘...요즘 많이 피곤한가.’

“펠다!!!!!”(냐냐)

원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어? 또 들린다.’

“...팬다...?”

“펠다!!”(냐냐)

방금까지 야옹으로만 들리던 소리가 또렷한 말로 들렸다.

‘처음 냠냠볼을 먹었을 때처럼 냠냐미말이 들린다.’

원이는 팔을 살짝 꼬집었다. 아픔이 느껴졌다.

‘...꿈은 아닌데. 나... 한 번씩 냠냐미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건가.’

원이는 자꾸 웃음이 났다.

원이는 냠냐미의 그림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팬다랑은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팬다가 아니냐미! 펠다냐미!!!”
(므웨옹! 냐아아야옹!)

“...펠다???”

“냐! 아까 펠리시다드는 행복이란 뜻이라고 했냐미.
길어서 내가 줄였냐미."
(야옹야옹)

냠냐미는 방금 만든 이름이
만족스러운 듯 몇 번이고 말했다.

“행복이라는 이름이냐미.
히히.” (야옹)

원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펠다.”

원이의 모습 위로 하늘색 세잎클로버 잔상이
전보다 또렷하게 떠올랐다.

“...펠다!!” (야옹!)

냠냐미가 작게 외쳤다.
분명히 원이 쪽을 보고 있었다.

“...응? 나?”

냠냐미가 끄덕였다.

원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펠다라는 거야?”

“냐냐~” (야옹)

냠냐미가 다시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원이는 가만히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좋은 이름이네.”

...

“펠다.”

그 이름을 부르니 가슴 안쪽이 한 톤 따뜻해졌다.

라디오는 계속 흘렀다.

(Welcome to today~ 오늘은 처음이야~
심장이 뛰고 있잖아 무엇이든 해보는 거야~)

신나는 노래와 슬픈 노래.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원이가 작게 말했다.

“너랑 있으면.
...내가 자꾸 웃게 돼.”

...

“...고마워.”

냠냐미가 원이를 봤다.

“나도 고맙냐미~!!” (야옹)

...

둘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Welcome to today~ 아쉬운 어제는 goodbye~
Whatever you want 이뤄질거야 웃어봐~)

냠냐미가 말했다.

"…오고 싶을 땐 오라냐미." (야옹)

...

...그리고 떠나고 싶을 땐 떠나라냐미.”(야옹)

원이는 냠냐미의 마지막 말에 가슴 한구석이 툭 내려앉았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원이는 방금 나눈 말들을 되짚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해?”

원이는 냠냐미를 보며 조심히 물었다.

“냠냐미는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

냠냐미의 얼굴에 잠깐 진지한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알아차릴새도 없이 빠르게 활짝 웃었다.

“...그런 건 아니냐미.” (야옹)

......

“...좋아서 있어주는 게.

......

…냠냐미는 좋냐미.”(야옹)

원이가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난 좋아서 여기에 있어.”

냠냐미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작은 몸뚱이는 기분 좋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르릉 댔다.

냠냐미는 원이에게 가까이 갔다.
그리고 짧은 앞발을 들어 원이의 머리에 콩 찍었다.

“화이팅 빔..! 원이... 오늘도 힘내라냐미!” (야옹)

원이가 머리를 만져봤다.
작은 발이 닿은 자리에, 어쩐지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원이는 냠냐미에게 인사를 하고 골목을 나갔다.

손에는 빈 봉지를 들고, 어깨에 작은 가방을 멘
며칠 전과는 다른 일상복 차림이었다.

골목에 혼자 남은 냠냐미는
스케치북 위에 그려진 작은 하늘색 클로버 한 송이를 오래 쳐다봤다.

라디오 소리가 어느새 작아져있었다.
이제는 귀를 기울여야 들렸다.

(Bloom~~
full of fruit~ Full of fragrance~)

라디오에 조금씩 잡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think 지직. ...moment 지직.
...happy happy 지지직. )

달이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며칠 전 가는 호에서, 오늘은 한쪽이 거의 둥근 자리까지.

상현달이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인사하듯 흔들렸다.

어둠 속, 골목 끝의 작은 그늘.
한 줄기 달빛에 닿은 푸른 회색털이 은빛으로 투명하게 반사되었다.
에메랄드빛 눈 한 쌍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라디오의 마지막 한 음이 작게 새어 나오다

...happy ending is ours... 치직—

사라졌다.

그 빛은 소리가 끊긴 뒤에도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천천히 꺼졌다.

✦ ✦ ✦

3장 「행복이라는 이름」 끝 · 4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