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그림자가 닿는 거리
원이는 알람을 듣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밝아 있었다.
머리맡의 휴대폰을 더듬어 화면을 봤다.
머리에 숫자가 한 박자 늦게 들어왔다.
“아아악!!”
원이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어제 친구에게서 빌려 온 정장이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유행이 조금 지난, 품이 미세하게 남는 재킷이었다.
소매가 살짝 길어 손목을 덮었지만 하루 면접용으로는 문제없었다.
마음이 급해서 셔츠 단추를 잠그는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졌다.
거울을 보고, 삐져나온 머리를 고데기로 대충 폈다.
서둘러 구두를 신고, 문을 닫고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갔다.
✦
밖으로 나오자마자 손바닥을 펼치니 차가운 빗방울이 닿았다.
올려다보니 어제 그 하늘 그대로였다.
‘우산을... 아니다.
가벼운 비잖아. 그냥 가자. 이러다 진짜 늦겠다.’
원이는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버스가 정류장에서 막 떠나는 게 보였다.
원이는 손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버스는 그대로 떠났다.
‘헥헥. 너무하시네. 저번에 학생은 태워주더니.
후. 침착하자. 침착. 택시. 택시를 타자.’
✦
원이는 숨을 고르며 바로 택시 앱을 켰다.
호출 버튼을 눌렀다.
주변 차량을 찾는 레이더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5초. 10초.
[주변에 차량이 없습니다]
‘제발... 제발...’
원이는 계속해서 호출 버튼을 눌렀다.
[주변에 차량이 없습니다]
[주변에 차량이 없습니다]
‘하. 길에서 잡는 게 빠르겠네.’
원이는 길가에 서서 손을 길게 내밀었다.
‘어 빈차다.’
원이는 손을 위아래로 크게 휘저었다.
빈차의 빨간불이 바로 앞에서 꺼졌다.
택시는 다른 손님을 태웠다.
‘와. 내가 먼저 흔들었는데.’
원이는 손을 빨리 흔들었다.
택시는 더 빨리 지나갔다.
“하......”
원이는 흔들던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졌다.
✦
띠링.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지원자님.
앞 면접이 지연되어 한 시간 늦어졌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이는 화면을 한참 봤다.
‘와! 다행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원이는 다시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
면접 장소에 도착해서 보니 재킷 어깨가 둥글게 젖어 있었다.
‘휴우. 안 늦었다...’
원이는 화장실에서 머리를 한 번 더 빗질하고,
젖은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털었다. 빗물은 자리를 지켰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원이는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
면접실 문이 열렸다.
지원자 다섯이 한 줄로 앉았다. 원이는 끝에서 두 번째였다.
옆자리 지원자의 양복 어깨는 마르고 깔끔했다.
머리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앉은 자세도 똑발랐다.
원이는 등을 조금 더 폈다.
✦
면접관은 셋이었다.
가운데에 앉은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질문이 시작됐다.
앞사람들이 대답하는 동안 원이는 준비해 온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원이의 차례가 왔다.
원이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준비한 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원이의 대답이 되었다.
✦
면접이 끝나갈 무렵, 가운데 면접관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분은 해주세요.”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원이는 무엇이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열심히...! 살고 싶습니다...!”
......
“저... 생활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아직 배운 게 많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잘 배우고 싶습니다...!”
...
가운데 면접관이 되물었다.
“여기 열심히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이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꼭 쥐어졌다.
✦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오른쪽 면접관이 입을 열었다.
“다른 회사에 가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건가요?”
원이는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면접관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저에게 죄송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원이를 보며 덧붙였다. 비꼬는 눈빛은 아니었다.
“여기는 학교가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앞으로는 잘 없을 거예요.”
‘아.’
원이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꼭 쥐어졌다.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원이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면접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면접실 문이 닫혔다.
복도. 엘리베이터. 로비. 회전문.
회전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 굵어진 빗방울이 얼굴에 닿았다.
원이는 양손으로 머리를 겨우 가린 채 버스정류장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
버스 창가에 앉았다.
빗방울이 유리에 부딪혔다가 길게 흘러내렸다.
원이는 그것을 한참 봤다.
‘여기는 학교가 아닙니다.’
‘여기는 학교가 아닙니다.’
그 한 줄이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몇 달 전, 두 분은 해외로 가셨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원이는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자기 길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어린애도 아니구, 저도 제 밥벌이는 하고 살 수 있어요~
제 걱정은 마시고 두 분 건강하게 잘 다녀오셔요~! 저는 괜찮아요.”
의젓한 딸의 모습으로 공항에서 그렇게 말했다.
서로 싸우듯 내려가는 빗방울이
중간에서 만나 더 빠르게 달리고, 사라졌다.
‘번듯한 직장을 바라는 건 아닌데......
그냥... 하루를 채우고 싶은,
무언가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싶다.’
“후.”
작게 쉰 한숨이 뿌옇게 창에 서렸다.
‘...나는
...뭘 하고 싶을까.’
창 너머 풍경이 빗물에 번져 흐릿했다.
✦
어딘가 익숙한 정류장이 뿌연 창 뒤로 지나갔다.
‘아.’
원이는 벨을 눌렀다.
(삐-)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네.’
내려야 할 곳에서 꽤 떨어진 곳이지만, 아는 길이었다.
원이는 걷기 시작했다.
공원 반대편 입구가 보였다.
✦
비는 내리다 말다 했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 보였다.
원이는 계산대 앞 우산에서 잠깐 멈췄다.
‘이미 다 젖었는데. 비도 금방 그칠 것 같고.’
원이의 시선은 다른 진열대를 향했다.
[고양이 캔 재입고! 길냥이들이 정말 좋아해요!]
‘가장 맛있는 고양이 캔이......’
원이는 가장 많이 비어 있는 칸에서 하나를 집고,
작은 사료 봉지를 집었다.
‘간식도 좋지만, 밥을 먼저 잘 먹어야지.’
계산대 옆에는 김밥이 있었다.
원이는 아침을 먹지 않았고, 점심도 먹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후...... 나도. 밥을 잘 먹어야지.’
원이는 자신을 위한 김밥 한 줄을 집어 봉지에 담았다.
✦
비는 거의 그치는 듯했다.
아는 공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이는 평소처럼 모퉁이를 돌았다.
모퉁이를 돌면 낮은 담벼락이 있고,
담벼락 아래에 주황색 지붕의 작은 집이 있었다.
「얌얌이집」
원이는 입구 쪽으로 다가가다 멈췄다.
집 안에 하얀 고양이가 잠들어 있었다.
‘설마 이 고양이가 얌얌이인 건 아니겠지...?
보다 보니 고양이 이름 같기도 하고.’
고양이는 방석 위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었다.
풍성한 꼬리가 코끝까지 말려 있었다.
작은 배가 천천히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훕. 정말 제집에서 자는 것 같잖아.’
원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며칠째 멀리서만 보던 고양이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하늘색 리본에 달린 방울이 숨에 맞춰 오르내렸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뻗지 않았다.
원이는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았다.
사료 그릇이 거의 비어 있었다.
물 그릇의 물도 바닥이 보였다.
원이의 입가가 풀렸다.
‘아주 잘 먹었네.’
원이는 봉지에서 사료 봉지를 꺼내어 그릇에 부었다.
사르륵.
알갱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지 않도록 봉지 끝을 손으로 받쳤다.
물 그릇도 깨끗하게 비우고 다시 채웠다.
원이는 자리를 뜨려고 일어나다, 봉지 안의 고양이 캔이 생각났다.
‘아, 맞다. 고양이 캔.’
집 한편, 비를 덜 맞는 자리에
완전히 내려놓는 순간까지 새근새근 소리를 확인했다.
원이는 떠나기 전 한 번 더 잠든 고양이를 봤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귀엽다... 잘 자.’
원이는 가방을 들고 벤치 쪽으로 걸었다.
평소에 망원경을 들고 앉아 있던 그 자리였다.
가방 옆에 봉지를 놓고,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
금방 그칠 것 같던 비는
가는 빗줄기가 되어 풀잎 위로 내렸다.
풀잎이 빗방울 하나의 무게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빗방울이 뛰어내릴 때마다
풀잎은 말없이 무게를 받으며 내려갔다 올라왔다 했다.
원이는 그것을 한참 봤다.
‘여기는 학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풀잎과 함께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
꼬르륵.
배가 울렸다.
‘김밥이나 먹자.’
원이는 옆에 둔 봉지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이 잡혔다.
“어라?”
봉지를 들여다봤다.
고양이 캔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봉지 안을 휘적여보았지만 김밥은 없었다.
......
원이는 일어나 고양이가 있는 쪽을 봤다.
‘...내가 뭘 하고 있지.’
원이는 피식 웃었다.
봉지에서 고양이 캔을 꺼내어 손에 쥐고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 ✦ ✦
하얀 고양이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빗소리가 다른 소리들을 눌러주는 게 좋았다.
세상이 잠시 자기 것이 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오늘은 가는 비였고, 산책하기 딱 좋은 비였지만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는 잠도 좋아했다.
며칠째 신경을 곤두세우고 돌아다니느라
노곤한 몸을 위해 오늘은 잠을 더 자기로 했다.
방석은 폭신했고, 바람을 막아주는 집 안은 따뜻했다.
빗소리가 자장자장 깔렸다.
✦
고양이는 앞발 끝부터 꼬리 끝까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등이 활처럼 휘어졌다가 풀렸다.
냐하
기분이 좋아진 고양이는 사료를 보고 멈췄다.
사료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료 알갱이 위에 빗방울 하나가 묻어 있었다.
물 그릇에도 깨끗한 물이 가득했다.
오? 자동인 거냐미?
어제 분명 실컷 먹었냐미...
고양이는 작은 머리를 굴리며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금세 활짝 웃었다.
이 몸을 위한! 아주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냐미!
밖으로 한 발 나와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후하~
그때 집 안 한쪽 구석에 놓인,
비닐에 싸인 길쭉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
고양이는 가까이 다가가 코를 들이댔다.
킁킁.
김밥...?! 이냐미?
고양이는 김밥 비닐을 앞발로 헤쳤다.
안에서 까만 김이 보였다.
그 안에 밥과 노란 단무지, 분홍 햄, 초록 시금치가 알록달록했다.
고양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흐흐흐 잘 먹겠냐미~~!
한 입 베어 물었다.
밥알이 부드러웠다. 단무지가 새콤하게 씹혔다.
햄이 짭짤하고 시금치가 고소했다.
김의 담백함이 입 안을 마무리해 줬다.
냠냠
냠냠
또 한 입.
또 한 입.
히히. 사람 음식이 더 입에 맞는 걸 보니
역시 거의 인간이 될 뻔한 구미호가 맞냐미. 히히.
마지막 한 입을 꿀꺽 삼키고 입가를 앞발로 닦았다.
비닐에는 밥알 몇 개만 남았다.
누군진 몰라도 아주 기특하냐미~!
이 몸이 아주 맛있게 먹었냐미~. 냐냐~.
고양이의 배가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
빗방울이 풀잎 위로 사락사락 내렸다.
배도 부르니 걸어볼까냐미~
고양이는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빗방울이 풍성한 꼬리털에 내려앉았다.
발바닥이 젖은 흙을 피해 걷는 리듬이 좋았다.
지붕 아래를 걷다가, 잠깐 빗속으로 나왔다가,
다시 지붕 아래로 들어갔다가, 가로등 아래를 지나갔다.
빗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닿으면서
투명한 폭죽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와아. 예쁘냐미...
땅에 고인 작은 물웅덩이에는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나이테 같은 파문이 퍼졌다.
고양이는 멍하니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히히. 기분 좋냐미...
차가 한 대 지나가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닿는 만큼 빗방울들이 나타났다.
공중에 떠 있는 빗방울들이 꼭 은하수를 잘게 부순 별가루처럼 반짝이다 사라졌다.
하아~ 정말... 행복하냐미.
고양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들은 다 작았다. 작아서 좋았다. 작은 것은 다 가져갈 수 있었다.
✦
고양이는 눈에 익은 길만 어슬렁어슬렁 돌았다.
배가 부른 채로 걸었더니 발걸음이 평소보다 더 느려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았다.
집 쪽으로 발을 돌렸다.
작은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꼬리가 살랑거렸다.
고양이는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
저 앞에 사람이 한 명 보였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양이는 멈췄다.
고양이 캔?!
기특한 사람...?!
사람과 고양이 사이로 훨씬 가늘어진 빗방울이 내렸다.
✦ ✦ ✦
원이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 앞에 작은 흰 형체가 있었다.
목에 하늘색 리본. 풍성한 꼬리. 분홍빛 볼.
세 가닥의 속눈썹이 바짝 올라가 있었다.
낮에 잠든 모습은 봤지만, 그 까만 눈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깊은 까만 눈이 원이를 보고 있었다.
원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
고양이는 원이를 보고 있었다.
어깨가 젖은 재킷이 빌려 입은 듯 조금 커 보였다.
더 다가오지 않고 거리를 지켜주는 듯한 이 사람이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고양이는 다시 한 발을 떼었다.
✦
원이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갈까 봐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멀리서만 봤던 고양이가
망설임이 없는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원이는 같은 속도로 쪼그려 앉았다.
손에 든 캔을 어색하게 흔들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네 거.”
고양이는 한 발 더 가까이 갔다.
캔을 봤다.
다시 원이를 봤다.
한 발 더 다가갔다.
고양이는 어느새 원이의 발끝 가까이까지 왔다.
둘의 그림자가 닿았다.
✦
원이는 고양이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뻗지 않았다.
대신 캔을 얌얌이집 옆 그 자리에 내려놓으려
다른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까진 김밥 포장지가 풀어진 채로 있었다.
안에는 밥알 몇 개가 붙어 있었다.
“...어?”
원이는 손을 멈췄다.
“김밥이... 없어졌네.”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새어 나왔다.
✦
김밥...? 그것은 냐미를 위해 준비한 게 아니었냐미...?
(냐..? 야옹?)
고양이의 귀가 쫑긋했다.
꼬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까진 김밥 비닐을 보고 있는 원이에게
고양이는 유쾌한 울음소리를 냈다.
이 몸이 잘 먹었냐미~!
(야~~옹!)
원이는 듣지 못한 채 비닐만 뒤적이고 있었다.
비닐을 손가락으로 들춰봤다.
“이상하다... 내가 산 김밥 맞는거 같은데.”
고양이의 귀가 움직였다.
‘...? 이 몸의 특식이 아니었냐미?’
원이는 고양이 쪽을 봤다.
고양이는 살짝 먼 곳을 바라보며 꼬리만 살랑거렸다.
그리고 슬쩍 자기 입가를 앞발로 닦았다.
“저... 이거 네가 먹었어?”
고양이는 시선을 돌렸다.
풍성한 꼬리 끝이 흔들렸다.
모르는 척하고 있는 듯한 고양이의 모습에 원이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었어. 내가 잘못 두고 갔나 해서...!
잘했어~! 맛있었어?”
고양이는 그제야 다시 원이를 봤다.
당연하냐미!
(냐~!)
원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캔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 이건 후식~?”
고양이는 이미 김밥으로 배가 부른 듯
캔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
원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벤치로 돌아갈까 했지만, 돌아가기가 망설여졌다.
이 상황이 꼭 돌아서면 흩어져 버릴 꿈처럼 느껴졌다.
고양이가 원이를 올려다봤다.
원이는 어색하게 한 번 더 쪼그려 앉았다.
✦
고양이는 원이에게서 어딘가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고양이가 목에 달린 방울을 쳐다보며 잠깐 망설였다.
입에서는 아직도 김밥 냄새가 났다.
‘흠...’
그 순간에도 원이는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양이가 목의 방울을 앞발로 톡 건드렸다.
톡.
방울이 경첩처럼 조용히 열렸다.
고양이는 안에서 냠냠볼을 하나 꺼냈다.
원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훗. 멋진 걸 보여주겠냐미.
(냨. 냐냐옹. 냐아옹냐아옹.)
고양이가 냠냠볼을 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잘 보란 듯이 원이를 흘긋 보더니
꼬리를 살랑이며 자신 있게 앞발을 들었다.
탕—
냠냠볼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고양이는 눈을 감고 씨익 웃으며, 곁눈으로 원이를 봤다.
고양이의 한쪽 귀가 쫑긋했다.
꼬리 끝이 쭈삣쭈삣 흔들렸다.
분명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와 신기하다!”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고,
꼬리를 한 번 더 위아래로 흔들었다.
고양이의 어깨가 더 올라갔다.
원이는 자리에서 박수를 쳤다.
(짝짝짝)
“정말 대단한 고양이!”
고양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앞발을 한 번 들었다 내렸다.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원이가 작게 웃었다.
✦
고양이가 쪼갠 반쪽을 입에 넣고,
눈을 천천히 감고 작게 부르르 떨었다.
캬 에너지가 도냐미.
(냐— 냐하아아냥)
그리고 남은 반쪽을 원이에게 내밀었다.
......
“나?”
고양이가 끄덕였다.
원이는 손을 내밀었다.
냠냠볼 반쪽이 손바닥에 올라왔다.
따뜻하지 않은데도 따뜻한 것 같았다.
원이는 건네준 냠냠볼 반쪽을 입에 넣었다.
✦
겉에서부터 화이트초콜릿이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 안쪽으로 파란 파우더가 씁쓸하게 스쳤다.
달콤쌉싸름한 다크 초콜릿이 지나간 자리에
진득하고 달달한 캐러멜이 천천히 녹아 흘렀다.
마지막으로 고소하고 단단한 너트까지 맛이 차례로 느껴졌다.
따뜻한 기운이 발끝까지 천천히 퍼졌다.
원이는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간질거렸다.
고양이와 원이 사이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세상의 소리가 단절된 듯 잠시 귀가 꽉 막혔다가,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원이의 모습 위로 하늘색 세잎클로버 잔상이 스쳤다.
아주 잠깐 스쳤지만,
고양이는 그것을 확실히 봤다.
고양이가 말했다.
“기분이 좋아졌냐미?”
(냐아아옹?)
원이가 고개를 들었다.
“...... 응?”
원이는 자기가 방금 들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양이를 봤다.
“방금.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고양이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내 말이 들리냐미?”
(냐아아아아옹~?)
원이는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네 말이... 들리는 건가...?”
고양이가 자리에서 작게 펄쩍 뛰었다.
“오오!! 내 말이 들리냐미!”
(야아아옹 야아옹!)
고양이는 자기 말을 알아듣는 원이를 보며 계속 말했다.
“나눠먹으면 말이 들리는가 보냐미~ 호오 신기하냐미.”
(냐냐옹 냐옹냐옹~ 냐아아옹.)
빗방울 하나가 처마 끝에서 떨어졌다.
✦
원이는 자기 귀를 만져봤다.
갸우뚱하며 흙바닥을 봤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을 봤다.
그리고 다시 고양이를 봤다.
고양이는 그 자리에서 분명히 자기를 보며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원이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카페인 때문인가.”
작게 중얼거렸다.
고양이가 갸웃했다.
“키키키 나도 모르냐미.
냠냠볼 파워 같냐미~”
(냐냐~ 냐냐앙 냐아옹 냐냐옹 냐옹냐냐옹~)
......
“...냠냠볼?”
고양이가 끄덕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원이는 작게 웃기 시작했다.
‘꿈이라면... 깨기 아쉽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 어깨가 일정하게 흔들렸다.
“정말 기운이 도네.
소중해 보이던데, 나눠줘서 고마워. 냠냠볼.”
✦
이상하게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고양이는 아까부터 머리를 기울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알파...카냐미?”
(냐아오옹?)
원이가 물었다.
“동물 알파카?”
“아니냐미.”
(야옹)
고양이가 머리를 흔들었다.
“베... 베지타블냐미?”
(냐아오옹?)
원이가 물었다.
“동물이 아니라 먹는 거야? 야채...?”
고양이가 머리를 흔들었다.
“감...감...마냐미”
(냐아오..)
원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시 감말랭이?!”
“아악!! 더 헷갈리냐미!!”
(야아아옹!)
원이가 풉, 작게 웃었다.
“델...”
(야..ㅇ..)
고양이는 진지해 보였다.
‘델리만쥬인가...?’
고양이가 자세를 고쳤다.
“흠.”
(냐.)
원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
“기억났어?”
고양이가 시익 웃었다.
“까먹었냐미.”
(뇨뇨~)
✦
고양이가 빗방울 묻은 털을 빗으며 말했다.
“이 몸은... 천팔백 살 넘은 구미호인 것 같은데,
이번 생에도 인간 되기 실패한 모양이냐미.”
(야옹야옹 야옹야옹.)
원이가 입을 살짝 벌렸다.
“천팔백 살... 구미호...?”
“그렇냐미!”
(냐!)
원이는 고양이를 봤다.
아무리 봐도 고양이였지만 그렇게 믿는 고양이가 귀여워 보였다.
“언제부터 구미호였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지나가다가 티비에서 봤는데 나랑 똑같이 생긴 여우가 인간이 되었냐미.”
(냐옹냐옹 야야옹냐옹냐옹.)
“하지만 넌 꼬리가 하나인데??”
고양이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냨냐)
고양이는 자기 꼬리를 봤다.
그리고 손톱을 꺼냈다.
풍성한 꼬리털 끝을 앞발로 잡고 열심히 가르기 시작했다.
두 갈래로 갈라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됐다.
세 갈래는 더 안 됐다.
아홉 갈래는 시도조차 무리해 보였다.
원이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웃음이 다시 나왔다.
하하하.
“구미묘!”
“구미묘가 뭐냐미?”
(냐냐옹?)
“인간이 되기 실패해서 고양이가 된 구미호.”
고양이가 꼬리 가르기를 멈추고 자신의 꼬리를 한 번 더 봤다.
“맞냐미. 이 몸은 구미묘냐미. 후후.”
(야옹)
✦
빗줄기가 가늘어졌다가 다시 굵어졌다.
장대비까지는 아니었지만, 가는 비는 아니게 되었다.
처마 아래에 둘이 앉아 있었다.
사람 하나, 고양이 하나.
고양이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풀잎을 봤다.
가로등 아래에 닿는 빗방울을 봤다.
작은 물웅덩이에 만들어지는 파문을 봤다.
“이런 것들을 보면 행복하냐미.”
(야옹 냐아앙옹.)
원이가 따라 봤다.
매일 지나가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가. 행복이 참 사소하네.”
고양이가 원이를 봤다.
“행복은 원래 사소하냐미.”
(냐야옹)
원이는 그 말을 잠깐 곱씹었다.
“...사소해서 좋은 건가.”
“그렇냐미~”
(냐냐~)
원이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빗줄기가 조금 더 굵어졌다.
고양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마 아래에서 한 발 빗속으로 나왔다.
또 한 발.
빗방울이 풍성한 꼬리털에 내려앉았다.
고양이는 거기서 잠깐 멈췄다.
그리고 뒷발로 한 번 폴짝 뛰었다.
작게.
또 한 번.
양쪽 앞발을 좌우로 한 번씩 휘저으며 폴짝거렸다.
원이가 처마 아래에서 그 모습을 봤다.
“...뭐해?”
고양이가 빗속에서 원이를 봤다.
“춤추냐미.”
(냐아아야옹)
“춤?”
“같이 출까냐미?”
(냐아아야옹?)
고양이가 작은 앞발을 내밀었다.
“...미친 짓 같은데.”
......
“...그래도”
원이는 젖은 재킷 소매를 봤다.
......
‘하고 싶다...!’
원이는 홀린 듯 일어났다.
처마 아래에서 한 발 빗속으로 나왔다.
젖은 재킷이 다시 젖었다.
또 한 발 나왔다.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양이가 먼저 한 번 폴짝 뛰었다.
원이가 따라 어색하게 한 번 뛰며 양팔을 휘저었다.
자꾸만 꿈인가 싶어 팔을 꼬집어봤지만,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났다.
“...이게 ...뭐야.”
작게 웃는 원이의 어깨가 흔들렸다.
고양이가 한 번 폴짝 뛰면,
원이도 한 번 폴짝 뛰었다.
빗방울이 두 사람 사이로 떨어졌다.
✦
(에취)
고양이가 재채기를 하며 부르르 떨었다.
“이 몸이 추위에는 약하냐미.”
(냐옹옹)
원이가 멈췄다.
“아이구 어르신... 천팔백 살이면 그렇겠네.”
“그렇냐미.”
(냐—)
원이는 망설임 없이 재킷을 벗었다.
안에 입은 셔츠가 젖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재킷을 우산 삼아, 품 안에 작은 몸이 들어오도록 비를 막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잔상이었다.
재킷 아래에서 작은 코끝이 씰룩 움직였다.
낯설지 않은 향. 아주 옅은 온기.
고양이가 부르르 몸을 털었다. 따뜻해진 모양이었다.
“고맙냐미.”
(냥냥~)
원이는 작게 웃었다.
“춤은 다 춘 거야, 구미묘?”
“같이 췄으니까, 다 춘 거냐미.”
(냐냐—!)
✦
빗줄기가 다시 가늘어졌다.
하늘 한쪽이 밝아져 있었다.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가는 호 하나가 잠깐 비쳤다가 다시 가려졌다.
둘은 재킷을 함께 뒤집어쓴 채로 처마 아래로 왔다.
한동안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떨어지는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원이는 품 안의 작은 온기를 가만히 느꼈고,
고양이는 그 온기에 기대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
비가 충분히 가늘어졌다.
“넌 이름이 뭐야? 혹시 얌얌이?”
✦
수풀이, 아주 잠깐 조용해졌다.
✦
고양이가 재킷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난 냐미냐미.”
(야—옹)
“얌얌이?”
“난 냐미냐미! 냐!미!”
(야와와아옹)
고양이가 작은 입으로 뱉은 “냐미, 냐미”가 빗소리에 섞여
원이의 귀에 뭉수그레하게 앉았다.
“아하, 냠냐미~? 잘 어울린다. 얌얌이랑 발음이 비슷하네.
냠냐미네 맞네.”
원이가 웃었다.
“난~~ 냐!미! 냐미!”
(야와와와앙옹)
“응 그래. 냠냐미.”
...
“흠. 냠냐미도 뭐 괜찮은 것 같냐미.”
(뫄아옹. 냐아아옹.)
고양이는 그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이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발음해봤다.
‘냠냐미. 냠냐미’
입에 잘 붙는 이름이었다.
“나는 원이.”
“원이냐미.”
(야옹)
“응.”
원이가 작게 웃었다.
냠냐미도 같이 웃었다.
✦
원이가 냠냐미를 작게 불러봤다.
“냠냐미.”
“냐.”
(냐)
“고마워.”
“뭐가 고마우냐미?”
(냐아아야옹?)
원이는 잠깐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그냥.”
“냐냐~~.”
(냐냐~~)
냠냐미는 더 묻지 않았다.
재킷 아래에서 작은 숨이 새근새근 새어 나왔다.
원이도 그곳에 가만히 있었다.
✦ ✦ ✦
2장 「그림자가 닿는 거리」 끝 · 3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