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멈춘 자리

해가 막 뜬 이른 아침.
하늘은 밝은 회색이었다.

큰 키에 다부진 어깨.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에는 오래 다져온 단단함이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가 땀에 살짝 눌려 있었다.
정이는 챙이 닳은 모자를 눌러썼다.

규칙적인 발걸음. 규칙적인 호흡.
발끝이 땅을 차고 다시 닿는 리듬.

한 걸음의 보폭이 넓었다.
오래된 운동가방이 같은 리듬으로 흔들렸다.

이 시간의 공원 공기는 달랐다.
새소리가 더 또렷하고, 발자국 소리가 더 잘 들렸다.

다른 사람의 숨소리는 물론 제 마음의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정이가 사랑하는 조용한 아침이었다.

정이는 공원 산책로를 몇 년째 같은 코스로 달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달렸다.
비가 와도, 바람이 강해도 달렸다.

처음에는 훈련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이 시간,
잡념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이 시간의 공기,
이 상쾌함이 좋아졌다.

주위가 소란스러운 날은 이어폰을 끼고,
아침을 깨우는 드럼비트에 발을 맞추며
그냥 달렸다.

달리는 동안은 다른 무엇도 생각하지 않았다.

몸이 알아서 하는 일만 남는 시간.
정이는 그 시간이 좋았다.

정이의 눈에 작은 빛이 돌았다.

산책로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째에 접어들었다.

여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뭇잎이 한 톤 진해져 있었다. 풀 냄새가 났다.

이른 아침에 더 진하게 나는 풋풋한 녹음이었다.

정이는 달리면서 나무들을 봤다.

나무들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늘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를 보고 있으면
시끄러운 마음이 금세 조용해졌다.

해가 한 뼘 더 올라와 있었다.

잔디밭 한쪽에서,
일찍 나온 아이들 몇이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공이 오갈 때마다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정이는 그 옆을 지나쳤다.

아이들의 소란이 뒤로 멀어졌다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가까워졌다.

달리기 열풍이 불면서,
정이는 이어폰을 끼고 뛰는 날이 더 많아졌다.

마지막 바퀴째에 접어들 즈음.
정이는 오른쪽 다리를 손으로 한 번 쓸었다. 며칠째 같은 자리였다.

뚜룽.

무선이어폰이 꺼졌다.

'아. 어제 충전하는 걸 깜빡했군.'

정이는 이어폰을 빼고 페이스에 집중했다.

어디선가 음악 같기도 하고 음악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정이가 페이스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이어폰을 오래껴서 귀가 피곤한가..?'

정이는 머리를 오른쪽 왼쪽으로 기울이며 손으로 물기를 빼듯
공기를 넣었다가 뺏다가, 제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매일 뛰는 자리에서 정이는 처음으로 멈췄다.

그리고,

이어폰이 아닌 곳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집중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랫소리에는 길이 보이는듯 했다.

정이는 노랫소리를 따라 걸었다.

공원 안쪽이었다.
산책로에서 벗어난 쪽이었다.

길이 아닌 줄 알았던 자리에,
수풀이 한 겹 열려 있었다.

‘이런 곳에 길이 있었나?
이 공원은 손바닥 안처럼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소리는 한 발짝 다가설 때마다 또렷해지더니,
담벼락 앞에서 숨을 멈추듯 사라졌다.

가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드니,
낮은 담벼락 아래 주황빛 지붕의 작은 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햇빛이 그 털 위에 내려앉았다.

정이는 멈췄다.
달리던 몸이 멈추자 숨만 크게 남았다.

따라오던 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대신해서
정이의 눈에 하얀 작은 고양이가,
가쁜 숨 너머로 또렷이 들어왔다.

분홍빛 뺨, 짙은 눈동자, 바짝 올라간 속눈썹 세 가닥,
숨에 맞춰 작게 흔들리는 하늘색 방울.

이상했다.

분명 처음 보는 고양이인데,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냠냐미는 이른 아침에 혼자 흥얼대고 있었다.

(냐— 냐냐— 냐냑냐—)

어제도 그제도 같은 자리였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흠... 잘 다듬으면 나올 것 같은데냐미...’

앞발로 턱을 괴었다.

(냐— 냐냐—나냑)

다시 해봤지만,
역시 같은 곳에서 막혔다.

집중하는 냠냐미의 네 발이
꼬리에 물든 빛과 같은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담벼락 너머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바람 없이 얌얌이집 옆 수풀들이 이따금씩 흔들렸다.

그때.
먼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냠냐미의 귀가 쫑긋했다.

걸음소리가 달랐다.
보통 산책하는 사람의 걸음이 아니었다.
뭔가 달리다가 멈춘 것 같은 걸음이었다.

'이건 원이도, 연이도 아니냐미.
또 누구냐미…?'

키가 크고, 다부진 체형이었다.
짙은 짧은 머리에 야구 모자를 쓰고, 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숨을 천천히 고르고 있었다.

냠냐미는 그 사람을 가만히 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참... 이상하냐미.'

원이와 연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결의
낯설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 ✦ ✦

정이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들뜬 숨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얀 고양이가 이 쪽을 보고 있었다.
경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정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다가 멀찌감치 선 채로 인사했다.

"흠. ...안녕?"

안녕하냐미. (냐.)

작은 울음이었다.

정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흠.'

냠냐미가 정이를 천천히 훑어봤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이었는데
덩치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거리를 두고 선 자리에서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사람이냐미.'

냠냐미의 꼬리가 흔들렸다.

정이는 고양이를 봤다.

햇빛은 여전히 흰 털 위에 머물러 있었다.
하늘색 리본에 달린 방울이 숨에 맞춰 작게 흔들렸다.
방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이는 그것을 한참 봤다.

요구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먹을 걸 주려고 하지도, 만지려고 하지도,
데려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있었다.

"뛰다가 들어왔어."

침묵을 깨고, 정이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 노래 같은 게 들리길래."

정이는 피식 웃었다.

"...고양이가 생각해도 이상한 사람 같겠다.

냠냐미가 귀를 쫑긋했다.

정이는 계속 서 있었다.
쪼그려 앉으려다 말았다.

이 고양이가 자기 자리에서 편하게 있는 것 같았다.
굳이 눈높이를 맞추려고 공간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 자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햇빛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무언가가, 머리 위 빛을 가리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

냠냐미는 그게 뭔지 볼 새도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굳었다.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코앞에서 났다.

냠냐미가 실눈을 떴다.

정이의 발이,
아직 허공에 들려 있었다.
하얀 공 하나가,
저만치 잔디 위를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공 빠졌다—!"

저쪽 풀밭에서 아이들이 뛰어왔다.
한 아이가 공을 주워 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이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아이들이 다시 왁자하게 멀어졌다.

정이는 들었던 발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냠냐미를 확인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냠냐미는 굳었던 몸을 천천히 풀었다.

가슴이 아직 콩닥거렸다.

오.. 고맙냐미!(냐앙!)

정이는 더 다가오지 않았다.
거리를 둔 그 자리에서, 그냥 냠냐미를 봤다.

냠냐미도 그 거리가 싫지 않았다.

'참…조용한 바위 같냐미.'

햇빛이 고양이의 흰 털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방울이 바람에 작게 흔들렸다.

정이는 고양이 주변을 찬찬히 봤다.

얌얌이집 입구 안쪽에 평평한 돌이 보였다.
위에 색이 살짝 빠진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고양이가 사는 자리구나.'

고양이를 보고 있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얼마나 흐르는지도 몰랐다.

한참을 말없이 보고 있던
정이의 어깨가 스르륵 내려갔다.

냠냐미도 그냥 있었다.

'…편한 기운이냐미.'

✦ ✦ ✦

냠냐미가 일어서 왼발, 오른발
차례로 길게 앞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냐아함-

정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냠냐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길게 늘어진 둘의 그림자가 쉽게 닿았다.

정이의 모습 위로.
하늘색 세잎클로버가 비쳤다가 사라졌다.

'엇? 펠다냐미..?'

정이가 잠깐 멈칫했다.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가 풀렸다.

정이는 익숙하게 귀를 털었다.

고양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온 것을 본
정이가 작게 웃었다.

"혹시 쉬는데 방해가 됐다면 미안해."

두꺼운 손을 모아 작은 고양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해 했다.

냠냐미가 정이를 봤다.

'엄청 조심스러운 사람이냐미.'

꼬리가 살랑 흔들렸다.

정이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모자 챙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어색한 동작이었다.

시간이 흐른 걸 느꼈는지
다시 발을 돌리려 하다
정이가 물었다.

"괜찮다면, 여기 또 와도 돼?"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
스스로도 어색한 것 같았다.

......

오고 싶으면 오면 되냐미~ (냐~~)

길게 우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꼭
오고 싶으면 와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다.

확실하진 않지만 고양이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정이는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고마워.“

✦ ✦ ✦

정이는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모자를 제대로 고쳐 썼다.
다시 발끝을 땅에 댔다.

정이는 천천히, 조깅 페이스로 왔던 길을 돌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에 혼자 남은 냠냐미는
정이의 뒷모습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봤다.

원이의 뒷모습.

연이의 뒷모습.

그리고
정이의 뒷모습.

세 사람의 뒷모습이
같은 자리에서 차례로 사라졌다.

냠냐미가 얌얌이집 앞에 다시 앉았다.

'익숙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이 늘어가냐미.‘

'…내일은 누가 먼저 올까냐미.'

햇빛이 길게 뻗었다.

공원 너머 하늘에
작은 별 하나가 낮 하늘 끝을 길게 흘렀다.

낮인데도 보일 만큼 선명한 별이었다.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자동으로 채워진 사료를 벌써 다 먹었냐미.‘

냠냐미는 슬슬 배가 고팠다.

냠냐미가 돌 위 카드를 한 번 봤다.
그리고 간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이가 오는 방향을 가만히 봤다.

✦ ✦ ✦

정이가 골목을 빠져나가고,
골목 입구에서 누군가 들어오려다가 멈칫했다.

곱슬머리. 검정 박시 반팔. 목에 걸린 실버 체인.

정이가 조깅 페이스로 지나쳤다.
연이가 한 발짝 비켜섰다.

두 사람의 눈이 한 번 마주쳤다.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정이는 그대로 지나갔다.

연이가 골목 안을 들여다봤다.

냠냐미가 얌얌이집 앞에 앉아 있었다.

"왔냐미!" (냐~~)

연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냠냐미~~ 나 왔어~."

연이가 가방에서 새로운 간식들을 꺼냈다.

"짜잔~~ 오늘은 또 새로운 맛으로 사왔지~~."

연이는 새로 사온 간식을
냠냐미가 먹기 좋게 풀어 앞에 놓아줬다.

히히 정말로 매일 오냐미?! 히히 (냐냥 냐아아아냥?)

냠냐미가 냄새를 맡고는,
정신없이 먹었다.

“아이구, 우리 냠냐미 배 많이 고팠구나. 천천히 먹어. 간식 많이 사왔어~!”

냠냐미가 먹는 동안
연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섰다.

"냠냐미! 근데 나 오늘 미팅 있어서 금방 가야 해.
이거 먹고 내 생각하고 있어~~ 내일 또 맛있는 거 들고 올게~~
내일은~~ 또 다른 맛으로 들고 올게. 흐흐"

오호 잘 다녀오냐미~~(냐앙)

냠냐미는 맛별로 깔린 간식을 차례로 비우고 있었다.

우물우물.

연이가 손을 흔들었다.

냠냐미도 우물대며
앞발을 한 번 가볍게 들었다.

연이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냠냐미는 연이가 사라진 방향을 봤다.
그리고 정이가 사라진 방향을 봤다.

배가 부른 냠냐미는
방석 위에 올라가 웅크렸다.
꼬리가 느릿느릿 흔들렸다.

수풀이 느릿느릿 따라 흔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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